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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

슬로시티 운동의 시작: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실험

1. 슬로푸드에서 슬로시티로: 느림의 철학 탄생

1990년대 후반, 전 세계는 빠른 성장과 글로벌화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소비 속도는 빨라졌고,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산업화를 가속화했다. 이 흐름 속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 패스트푸드의 상징인 맥도날드가 로마 스페인 광장에 입점하면서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던 시기였다. 이 운동은 ‘맛있고, 깨끗하며, 공정한 음식’을 지향하며 패스트푸드의 획일성과 자본 논리를 비판했다.

오르비에토는 이 슬로푸드 철학에 깊이 공감했고, 이를 도시 전체로 확장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당시 시장이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는 단지 음식만이 아니라, 도시의 운영 방식과 시민의 삶의 질 전반을 바꾸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슬로시티(Slow City)’ 또는 ‘치타슬로(Cittaslow)’**다. 이는 도시가 삶의 속도를 늦추고, 그 지역 고유의 자연, 문화, 전통을 지키면서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철학에서 출발했다.

슬로시티 운동의 시작: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의 실험

2. 오르비에토의 선택: 도시 전체를 실험실로

오르비에토는 단순한 슬로시티의 ‘아이디어 제안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슬로시티 철학의 실험장이자 첫 번째 실행 도시였다. 사투르니니 시장은 행정, 식문화, 건축, 교통, 환경, 공동체 운영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반을 슬로시티의 원칙에 맞춰 재설계했다. 예를 들어, 도심에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입점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는 식당을 장려했으며, 전통시장과 장인들의 생존 기반을 지키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오르비에토 특유의 역사적 도시 구조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건축이나 관광 시설의 무분별한 개발을 억제했다. 대신 주민 참여 기반의 공동체 활동, 지역 축제, 생태적 교통 체계 도입 등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이와 같은 실험은 단기적 경제 효과보다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도시 운영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오르비에토는 느림을 통해 지역성 회복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고, 그 방향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과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3. 치타슬로 조직의 창립과 국제 확산

2000년, 오르비에토를 포함한 4개 이탈리아 도시(그레베 인 키안티, 포사노, 브라)는 공식적으로 Cittaslow International 조직을 창설했다. 이는 단순한 도시 브랜드가 아니라, 구체적인 철학과 실행 기준을 갖춘 인증 제도를 수립하는 세계 최초의 ‘느림 도시 네트워크’였다. 이 조직은 슬로푸드 운동의 지원을 받으며, 도시 인증을 위한 항목을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이 기준은 환경정책, 도시 인프라, 로컬푸드 시스템, 전통문화 보존, 주민 참여, 관광관리 등 70여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치타슬로 인증을 받은 도시는 단지 '슬로우'하다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정책적으로 느림을 구현하고 있는 도시임을 의미한다. 오르비에토는 이 기준을 바탕으로 유럽을 넘어 전 세계 도시들과 철학을 공유하고, 협력 프로젝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 중국, 독일, 터키, 네덜란드 등으로 슬로시티 네트워크는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현재까지 30개국 280여 개 도시가 치타슬로 인증을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오르비에토는 ‘운동의 시작점’이자 ‘이상적 모델 도시’로 평가받게 되었다.

 

4. 오르비에토가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오르비에토의 슬로시티 실험은 단순한 지역 정책이 아닌, 글로벌 도시운영 패러다임의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대도시 중심의 성장이 아닌, 소도시 고유의 정체성과 지속 가능성을 중심에 둔 도시철학이 등장한 것이다. 특히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속도보다 더 빨라지고 있는 21세기, 슬로시티는 ‘삶의 본질을 되찾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인간 중심, 생태 중심, 공동체 중심의 가치로 다시 도시를 설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천적 모델이다.

오늘날 오르비에토는 단순한 관광 도시를 넘어서, 전 세계 슬로시티 도시들의 교류와 학습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슬로시티 국제본부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위치하며, 새로운 도시들의 인증과 컨설팅, 교육 등을 담당한다. 또한 다양한 국제 포럼과 학술적 연구, 정책 교류의 허브 역할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르비에토의 실험이 보여준 교훈이다. 도시는 빠를 필요가 없다. 깊이 있고, 지속 가능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으면 그것이 진짜 도시다. 오르비에토의 느린 실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소도시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